우리민족을 위해 전쟁의 일선에서 산화하신 호국인물을 현양하는 행사로 매달 호국인물을 선정한다. 이달은 김윤후 장군 편이다 김윤후 장군은 승려 출신으로, 1232년(고종 19) 몽고군이 침입하자 처인 성(現 용인)에 들어가 고을을 방어했다. 몽고군이 마침내 처인 성을 공격해 오자 적장 살리타이(撒禮塔)를 화살을 쏘아 사살하는 등 성민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항전했다. 적장을 잃은 몽고군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그 기회를 틈타 고려 군민이 총공격을 가하자 몽고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처인 성 북쪽으로 퇴각했다. 고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무관 최고직인 상장군(上將軍 정3품)을 제수하였으나 그는 자기 혼자만의 공이 아니라며 이를 사양하여 섭랑장(攝郞將 정6품)에 임명되었다. 이후 1253년(고종 40) 몽고가 또다시 고려를 침공하자 충주산성의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파견되어 수성의 책임을 맡았다. 그해 10월 몽고군이 충주 성을 포위하자 김윤후 장군은 충주성의 관민을 지휘하여 70여 일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항전이 장기화되면서 식량이 바닥나고 민심도 동요하자 “공을 세운 자는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자 이에 고무된 충주성민들은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했다. 결국 충주성 함락에 실패한 몽고 주력군은 포위를 풀고 고려에서 철군했다. 이로써 김윤후 장군은 탁월한 리더십과 불굴의 항쟁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정복전쟁을 수행하던 몽고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다. 이 공로로 감문위(監門衛)의 상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전공을 세운 관노와 백성들은 전공의 크기에 따라 벼슬을 받았다. 이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추밀부사(樞密副使)를 거쳐 수사공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임명된 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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